작성자
관리자댓글
0조회
1,422등록일
2024-12-30
동문인터뷰> 김정옥 얼굴박물관장 (불문51-56 /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
링크 :
https://www.snua.or.kr/magazine?md=v&seqidx=11888 -
이동 횟수
6
국내 문화예술계의 원로인 김정옥 얼굴박물관장((불문51-56 /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 지난 10월 ‘2024년 문화예술발전 유공자’ 시상식에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총동창신문 12월호에 실린 김정옥 관장의 인터뷰 기사를 전재합니다.
11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경기도 광주 남한강 기슭에 자리한 김정옥 동문의 집을 찾아갔다.
93세를 바라보는 김 동문은 국내 문화예술계의 대표 원로다. 100여 편의 독창적인 연극을 연출하고 국제극예술협회(ITI) 세계본부 회장을 세 차례 연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도 지냈다. 한 해가 저무는 때,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에 축하를 전할 겸 덕담을 청해 듣고자 김 동문을 찾았다. 마침 올해가 그가 운영하는 얼굴박물관 개관 20주년이기도 했다.
얼굴박물관 위층에 마련된 거처는 남한강과 건너편 설산이 한눈에 펼쳐졌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김 동문에게 눈을 보니 어떠냐 물으니 “아름다운 풍경에 아이들처럼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좋은데 저 눈 때문에 운송업자 등 피해를 보는 분들도 많을 거야. 세상만사가 덕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지. 그러니까 덕을 보는 사람이 덕을 보지 않는 사람한테 도움을 주도록 노력해야지”라고 했다.
-얼마 전 문화계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으셨지요? 축하드립니다.
“인생의 말년에 영예로운 상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2000년대 초반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훈장(코망되르)을 받았는데, 활동했던 양쪽 나라에서 모두 큰상을 받아 참 기쁩니다.”
-선생님 연극을 사전에 보고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볼 수가 없어서 자료만 뒤적이다 왔습니다.
“내가 연출했던 연극이 쉽지가 않아 이어가는 연출가가 드문 것 같아요. 총체 연극이라 해서 배우들이 대사뿐 아니라 창, 무용 등 다재다능해야 하거든요. 배우 섭외가 어려울 거예요.”
-어렸을 때 영화를 더 좋아하신 것 같은데, 연극 연출가가 되셨어요.
“어린 시절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다가 중학생 때 서울에 와서 극장에서 쇼를 많이 봤어요. 백년설이나 남인수 이런 분들의 공연도 좋았고요. 이런저런 연극을 보면서 공연하는 분들과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극으로 가게 됐지요.”
-희극을 많이 올리신 것으로 압니다.
“당시만 해도 일제 강점기, 전쟁 등의 상흔으로 우리 연극이 대체로 어두운 걸 선호했습니다. 연극의 다양화를 위해서 유럽의 코미디 연극을 많이 소개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시적인 연극도 연출했고요. 제 연극의 기반은 희극이라고 보면 되죠.”
-어떤 연출가였나요?
“배우들에게 무섭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연기자가 할 수 있도록 연기를 끄집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워크숍을 많이 하는 연출가였죠.”
-문화계 원로로서, 요즘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이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현상을 흐뭇하게 보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이런 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뒷받침이 있었다고 봐요. 순수 문화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연극, 클래식 음악 등은 수십년 전부터 인정을 받았지요. 중국, 일본과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전통문화도 큰 바탕이고요. 문화만큼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게 없잖아요? 지금의 기운을 잘 살려서 세계 속으로 계속 뻗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연극으로 한정하면, 여전히 힘든 연극인들이 많잖아요. 뭐가 문제인가요?
“뭐랄까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은 나눠먹기식 지원이 많아요. 큰 도움이 못 되죠. 재미있고 좋은 연극을 많이 올리는 극단은 더 격려를 해줘야 할 것 같아요. 대기업의 후원도 더 커져야 할 것 같고요.”
-집 들어오는 길목에 얼굴 조각, 그림들을 봤어요. 어떤 계기로 이렇게 많은 조각품, 그림을 수집하게 됐나요.
“연극을 하다 보니 얼굴에 관한 관심이 커졌어요. 연극에서 표정 연기가 중요하잖아요. 이곳저곳 다닐 때면, 다양한 얼굴 표정의 석인, 목조각,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과거에는 이런 작품에 관심이 없어서 버려지는 것도 많았고, 사는 데 큰돈이 들지 않았죠.”
-박물관 개관한 지 20년이 됐네요. 운영은 어떠세요.
“쉽지 않아요. 김대중 대통령 시절 박물관 지원 제도가 있어서 열게 됐는데, 그 제도가 일몰법이어서 지금 지원은 많지 않습니다. 재단을 만들까, 우리 박물관에 관심 많은 기업에 팔아야 하나 고민이 있습니다. 얼굴과 밀접한 화장품 회사에서 운영하면 좋을 텐데요.”
-남한강을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는 시간이 많을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을 많이 해요. 6·25 전쟁 중에 많은 친구가 죽었는데, 살아남았어요. 연출한 연극들은 대부분 관람객이 많았고, 특히 해외에서 평이 좋았지요. 교수로 있으면서 연극 연출하고 해외도 자유롭게 다녔고요. 학교에서 많은 배려를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30대 초반에 이화여대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어요. 병원이 언덕 위에 있었는데, 잔디밭에 불이 붙은 겁니다. 창밖으로 보니 불이 금방이라도 병원으로 달려들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돌풍이 불더니 그 불을 꺼주더라고요. 그리고 사라졌어요.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뭔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날 많이 도와주신 것 같아요.”
-살아오시면서 후회되는 것도 있으세요?
“금호그룹을 창업한 박성용이 친구였어요. 대학 졸업 후 프랑스 유학을 준비할 때 이 친구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로 돼 있었어요. 저는 12월, 이 친구는 이듬해 1월로 예정돼 있었는데, 같이 도쿄에서 좀 놀다가 1월에 가자고 해서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1월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병원에 불이 나는 바람에 늦게 유학을 떠나게 됐어요. 놀고 간다는 생각이 잘못된 거였지요. 불난 게 제 잘못 같았고요.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적극적으로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전 대체로 만족합니다. 결국 인생이라는 게 만남이 참 중요해요. 저는 좋은 사람을 95% 만났고 좋지 않은 사람은 5% 만난 것 같습니다. 그 5%는 제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연출한 작품에 만남과 죽음을 소재로 한 게 많지요?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세요.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만남의 종말이죠. 가족, 친구 다 못 만나게 되는 거니까. 헤어짐은 모든 생명체의 숙명이지요.”
-유언을 준비하셨나요?
“이제 써야 될 것 같기는 한데, 아직이요.”
-어떤 말을 남기고 싶으세요?
“자립정신을 갖고 살아라. 결국 모든 인간은 외롭고 독립된 존재지요. 그러니 누구에게 기대고 살지 말아라. 청첩장에 누구의 아들, 딸이 결혼한다고 쓰잖아요? 저는 부모님 이름 빼고 나와 누가 결혼한다 그렇게 썼어요. 당시로는 좀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독립해서 결혼하는 것이지 누구의 딸, 아들이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의 자립정신 강조는 여성, 국가로까지 확대됐다. “우리나라도, 여자들도 궁극적으로는 독립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미국 또는 중국에 기대려면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독자 정신이 있어야죠.”
-종교는 없으세요?
“집사람이 성당을 다녀요. 아내 따라 다니다 작년에 세례를 받았지요. 그런데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다종교 주의라고 할까, 불교, 무속 다 받아들입니다.”
-요즘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몇 해 전 떠난 오태석 후배가 생각이 나요. 언젠가 이 친구와 신문사 기자들이 술을 마시다 대판 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싸움 말리느라 고생 좀 했죠. 이 후배가 재능이 많은 연출가였어요. 이 친구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기자들과 싸움이 붙은 거예요. ‘너희들 까불지 말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대통령보다 더 높은 사람이다.’ 그러면서요. 그러니까 ‘네가 왜 대통령보다 높으냐, 너 빨갱이 아니냐’ 하니까 오태석이 ‘청와대로 전화해서 누가 더 높은지 물어봐라’ 그러면서 주먹이 오가려는 걸 막느라 안경이 떨어지고… 예술인으로서 자의식이 무척 강했던 후배지요.”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정치인들이 연극을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연기를 너무 못해. 정치인들이 대립하고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수준이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상대방 칭찬도 하면서 주장을 내세우고 해야지, 흠만 잡으면 양쪽이 다 망해버리지 않겠어요. 칭찬할 게 없겠지만, 연기를 해야지요. 그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하느라 피곤할 텐데, 왜 그리 답 없는 싸움만 하는지 몰라요. 연극을 좋아하면 싸우는 방식도 달라질 겁니다.”
김남주 기자 - 총동창신문 561호 2024년 12월 <인터뷰 / 동문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