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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등록일
2023-05-27
1970년대 단과대학 축제 이모저모- 대학신문에 '파트너 구해줍니다'
50년 전 대학신문엔 ‘파트너 구해 줍니다’
청년문화 상징이란 책임감 커
권위주의 정권시절 휴교령 빈번
1975년 축제를 즐기는 남녀 학생들.
1975년 축제를 즐기는 남녀 학생들.
학원사태와 휴교령이 빈번했던 1970년대. 힘든 시절에도 대학생들은 대학문화이자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축제를 공들여 가꿨다. 모교의 경우 1975년 이전까지 곳곳에 흩어진 단과대별로 강한 개성을 지닌 축제들이 성행했다. 문리대 ‘학림제’, 공대 ‘불암제’. 법대 ‘낙산제’, 상대 ‘홍릉제’, 사대 ‘청량제’, 농대 ‘상록제’, 가정대 ‘아람제’, 치대 ‘저경제’, 약대 ‘함춘제’ 등이다. 당시 축제는 학술강연회, 토론회, 체육대회, 음악회, 촌극, 모의국회 등 다양한 학생 행사가 집약된 장이었다. ‘대학생들의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는 주제 의식도 분명해 문리대는 축제에도 4·19 정신을 계승하는 내용을 담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축제에 임하는 자세가 마냥 진지할 수만은 없을 터. 마지막날엔 카니발을 열거나 운동장에 모여 이성 파트너와 블루스, 디스코, 포크댄스를 추는 것이 관례였다. 여대생 수백명이 축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커플들의 앞엔 1960년대 주로 마시던 막걸리가 아닌 생맥주가 놓였다. 인생의 반려자를 축제에서 찾은 학생도 많았다.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후 학도호국단 주관으로 범서울대 축제인 ‘대학축전’이 열렸다. 학생 주도의 축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반발도 있었지만 7일간 열린 제1회 대학축전은 성대했다. ‘동창의 날’도 있어 마치 홈커밍데이처럼 총동창회장과 동문들이 참석해 축제에 어울렸다. 아직 관악으로 이전하지 않은 단과대학은 각각의 캠퍼스에서 축제를 열었다.
1970년대에도 외부 연예인이 축제에 초청됐다. 고려대 출신 학생 가수 김상희씨가 모교에 초청되어 ‘대머리 총각’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언제나 축제 즈음엔 파트너 구하기가 고민이었던 듯하다. 1976년 가을 축제를 앞두고 대학신문에 ‘파트너가 없는 남녀 학생들을 짝지어주겠다’는 공고가 실렸다. ‘접수장소인 학생회관 3층 여학생부실이 신청자로 장사진을 이뤘는데, 성비는 남성이 9 대 1로 압도적이었다’고 기록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구 문화가 만연한 것을 반성하며 축제에서도 민속문화의 비중이 커졌다. 1979년 모교 축제 중 열린 봉산탈춤 공연에는 1000명의 관객이 모였다. 당시 출연자 몇 명이 빠져 공연을 취소하려 했지만 뜨거운 성화에 못이겨 강행했다는 후문이다.
총동신문 5월 15일자 542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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