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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4
김승웅 (외교 61-68) <아 문리대! ① > 그 머릿말과 뒷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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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kglee0/222830865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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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 기록에 의하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하 서울대 문리대 또는 문리대)의 마지막 수업은 1975년 1월 17일에 있었다. 이날 오전 9시, 서울대 문리대 과학관 407호 강의실에서 동숭동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수업이 진행된 것이다.
29년 동안 캠퍼스를 지켜온 화학과 최규원 교수는 25평 남짓한 강의실을 한 번 둘러본 후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 수업입니다. 더 열심히 들어 주기 바랍니다”라는 말과 함께 수업을 시작하였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수업을 마치고는 학생들에게 “이제 동숭동 캠퍼스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다시 못 올 고향을 떠나는 기분”이라는 감상을 남겼다. 관악 캠퍼스로의 이사는 그 후 3일 뒤인 1월 20일부터 시작되었다.(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55∼56쪽)
왜 문리대는 동숭동을 떠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때까지 15년간에 걸쳐 지속된 박정희 독재에 저항한 학생운동의 본거지가 동숭동이었기 때문이라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정설로 되어 있다.
서울대는 1975년 캠퍼스를 관악산으로 이전하는 일대 변혁기를 맞았다. 끊이지 않는 학생 시위에 시달린 박정희 정권은 시위의 온상인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를 관악산 골짜기로 몰아넣는 기발한 발상을 하기에 이른다. 후일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사를 할 당시는 힘에 밀려 쫓겨간다는 분노가 이들을 짓눌렀다. 캠퍼스는 의도대로 외곽에 환상도로를 만들어 시위 진압 병력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형태로 설계되었고, 정문 앞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관악파출소’가 들어섰다. 대학본부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주하고 신림동 하숙촌에서는 너덧 명의 학생만 모여도 문밖에 정보 형사들이 어른거리는 살벌한 시절이었다. ‘관악고등학교’라는 자조도 섞여 나왔다.
(〈‘문·사·철’의 긍지 떨친 최고 지성의 큰 산맥〉, 《시사저널》 1698호, 2022.4.30.)
2.
캠퍼스 이전만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문리대가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으로 해체된 것이었다. 김용호(金容浩, 정치학과 71)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필자는 1975년 2월 25일, 서울대가 동숭동 캠퍼스에서 개최한 마지막 졸업식을 마치고 ‘서울대 종합화 계획’에 따라 수백 대 트럭의 이삿짐과 함께 관악에서 대학원 정치학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당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문리대(College of Liberal Arts and Sciences)가 해체돼 사회대, 인문대, 자연대로 나눠진 것이었다. 문리대를 이렇게 분리한 경우가 전 세계적으로 드물었고, 또 분리하는 학문적 근거도 빈약했기 때문에 문리대 해체에 대한 반대가 심했지만 그대로 추진된 결과 오늘에 이르렀다. 심지어 문리대를 해체하면 학장 자리가 2개 더 늘어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다. 그 후 전국의 모든 대학이 서울대와 같이 문리대를 해체하고 사회대, 인문대, 자연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에는 문리대가 있지만 대한민국에는 없다. 이처럼 우리나라 대학은 천편일률적이어서 학문적 다양성이 지극히 부족하다. 앞으로 서울대만이라도 문리대 복원 문제를 치열하게 토론하면 좋겠다. 학문 간의 융합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문리대 해체는 좋은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김용호, 〈문리대를 그리워하면서〉, 《대학신문》 2021.8.29.).
3.
이 책은 문리대 복원을 소망하며 내가 썼던 글과 간직했던 자료,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그 외 사람들의 글과 자료를 모아 만든 것이다. 책의 뼈대는 김승웅(金勝雄, 외교 61)이 주관하는 ‘마르코 글방’에 투고했던 〈아, 문리대!〉라는 제목의 글로 삼았다. 2009년 4월 30일 내가 쓰기 시작한 〈아, 문리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김승웅 방장,
이제는 돌아가려 해도 다시 갈 수 없는 문리대의 낭만과 자유의 냄새. 그 봄이 되니 더 간절하구나. 솜씨 없이 쓴 글로나마 되돌아가 보려 하니 너그럽게 봐주시게.
〈아, 문리대!〉는 2010년 12월에 이르러 91회까지 계속되었으니, 책의 뼈대를 만들기에는 넉넉하다. 내용은 내가 겪었던 일을 위주로 하여 다른 이들의 경험도 참고하였으나 자칫하면 개인사(個人史)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기록을 동원했고, 그 가운데서 문리대 정치학과 동기 김도현(金道鉉)이 제공한 자료가 큰 역할을 했다.
내가 문리대에 들어간 때가 1961년이었고 그 후 60년 이상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기억력 감퇴는 다행히 〈아, 문리대!〉를 미리 써놓아 보완할 수 있었고, 자료 부족은 여러 사람의 기록이 보완해 준 것이다. 사진 등 자료의 경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선명도가 떨어지는 것이 유감스럽기는 해도, 태반이 요즈음 구할 수가 없는 것들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
특히 2021년부터 국립중앙도서관 주관하에 (사)현대사기록연구원이 시행하고 있는 ‘동숭동 지역 역사에 관한 구술채록’ 사업을 통해 동숭동 문리대의 희미한 모습을 조금씩 복원해가고 있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4.
자유와 다양성으로 가득했던 문리대는 내가 평생 ‘졸업’할 수 없던 학교였다. 지금도 내가 정신적으로는 문리대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면 과장된 말일까?
그것은 문리대 시절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고초를 당하다가 형식적으로 ‘졸업’은 하였으나, 이른바 ‘졸업’ 후에도 학생운동 배후조종 혐의로 투옥되는가 하면 대학에서 강제 해직당했고, 먹고살기 위해 취업한 입시학원 강사직에서도 박정희 후계자인 전두환에 의해 추방당하는 등 풍파를 겪었음에도 지금까지도 문리대식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부터 전두환 시절에 이르기까지 나는 ‘A급 요시찰(要視察)’이었다. 국경일이면 형사의 감시하에 외출할 수도 없었고, 외국으로의 출국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8년 여권(旅券)이란 것이 처음으로 나와, 서적구입을 위해 도쿄로 출국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같은 사태의 근원은 모두 문리대였다. 문리대 시절 함양된 저항 정신이 ‘졸업’ 후라고 해서 사라질 리 만무했고 이에 따라 감시가 계속 따라붙은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다양성을 추구했던 문리대 정신이 사라지지 않고 나를 에워싸, 나이 여든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를 부추기고 있으니 어찌하랴!
5.
내게는 ‘평생’ 졸업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사라져 돌아갈 수도 없는 학교 – 문리대! 그 문리대의 옛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나? 거기서 우리는 그 찬란했던 젊음을 어떻게 보냈는가? 그리고 그 시절 우리가 민주 사회를 파괴한 세력에 대항해 어떤 명분을 내세워 움직였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문리대의 요체(要諦)는 자유로움과 다양성이었다. 이 둘은 절대 떼어놓을 수가 없다. 자유로움에서 다양성이 생기고, 다양함을 인정해야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문학부와 이학부가 결합된 문리대는 이처럼 다양하고 자유로웠다.
당시 문리대에 있던 학과를 보자. 문학부에는 국문학과, 영문학과, 독문학과, 불문학과, 중문학과, 언어학과, 사학과, 철학과, 미학과, 종교학과, 정치학과, 외교학과, 사회학과, 사회사업학과, 고고인류학과, 지리학과 등, 이학부에는 물리학과, 화학과, 수학과, 지질학과, 천문기상학과, 동물학과, 식물학과 등이 있었고, 거기다 의예과와 치의예과도 문리대 이학부 소속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문리대에 입학한 1961년에서 시작하여 문리대가 사라진 1975년까지의 자유롭고 다양했던 문리대와 그곳에서 약동했던 젊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주요 내용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문리대에서 약동했던 젊음이 그 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했는지도 살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추억을 통해 자유와 다양성의 중요성을 살필 것이다.
이 책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 가운데 동숭동 문리대 출신에 대해서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졸업 후의 경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의 삶의 모습이 재학 시절과 달라진 경우가 있기는 했어도, 이 책의 목표가 개인적 삶이 아니라 동숭동 문리대의 진면목을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6.
문리대는 복원되어야 한다. 오직 취직만을 위해 매진하는 오늘날 대학생들의 획일화된 모습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 전문가가 외치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지난 4월 사회대가 주최한 ‘한국 사회의 위기와 사회과학’ 세미나에서 오늘날 대학이나 학과가 너무 분절화(分節化)돼 있어 한국 사회의 위기 진단과 처방이 단편적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특히 서울대는 1975년 종합화과정에서 문리대를 해체한 후 거의 반세기 동안 과거보다 더욱 분절화된 학제를 거의 변동 없이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가정대에서 생활과학대, 농대에서 농업생명과학대 등 일부 명칭이 변경되거나 간호대학과 자유전공학부 등의 신설이 전부였다. 학제 개편이 비교적 쉬운 대학원에서는 정부 방침에 의거해 국제대학원, 치의과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이 등장했고, 최근 국제농업기술대학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등이 신설됐으나 학부 학제는 거의 변동이 없다.
최근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라 문명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바,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 서울대가 하루빨리 대학과 학과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가로막고 있는 제도적 요인 중의 하나는 4년 단임제 총장제도이다. 학제 개편 계획 수립과 실행은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4년 임기의 총장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학제 개편을 위해서는 총장 임기가 적어도 8년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4년 동안 업적이 많은 총장은 연임을 보장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총장이 학제 개편을 비롯해 대학의 중장기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김용호, 〈문리대를 그리워하면서〉, 《대학신문》 2021.8.29.).
그렇다! 다양한 가운데 창의성이 함양되도록 학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왜 그런지를 살피기 위해, ‘아, 문리대!’를 외치며 긴 여정에 들어가기로 하자.
2022년 7월
송철원 쓰다
문리대의 소멸
1.
문리대(文理大)는 지금 없다. 문리대라는 건물도 없고, 문리대라는 이름 자체도 소멸(消滅)했다. 남아있다면 그 문리대가 위치했던 동숭동 터와 그곳 문리대라는 관문을 거쳐 사회로 빠져나온 졸업생들, 그리고 그 졸업생들의 뇌리에 각인된 문리대에 관련된 추억뿐이다.
아, 소멸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소멸은 아름다운 것 아닌가. 살아생전 못 느끼던 어머니의 사랑을 시인 이성부(李盛夫)는 〈노고단에 여시비 내리니〉에서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여시비 맞고 활짝 웃는 풀꽃을 보는 순간 환하게 웃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고 울어버린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소멸한 어머니의 위력이다. 어머니는 살아있지 않고 소멸했기에 그 자식을 울린다. 대학 시절 이발만 하고 와도 “우리 새끼, 참 달덩이처럼 생겼네”라며 흐뭇해하시던 어머니, 그 소멸한 어머니를 나는 80이 다 되어가는 이 나이에도 떠올린다. 그리고 운다. 살아 계신 어머니를 보고 우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다. 내가 문리대를 그리워하는 건 그 문리대가 소멸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잔류하는 문리대를 말하거나 그립다고 예찬론을 편다면 그건 한갓 학교 자랑이거나 아니면 그 학교를 졸업했다는, 서울대생 특유의 천민(賤民) 엘리트 의식에 불과할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글이 쓰여지는 동인(動因)을 나는 그 문리대의 소멸! 에서 찾는다.
같은 서울대학이지만 문리대는, 천민 엘리트들이 지금도 곧잘 비교의 잣대를 들이대듯, 공대(工大)와 의대(醫大)처럼 커트라인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상대(商大)처럼 취직이 보장되는 대학도 아니었다. 문리대는 그저 문리대일 뿐이었다. 지금도 어쩌다 출신대학을 묻는 질문에 부딪힐 경우 우리는 그저 문리대를 졸업했다고만 대답한다. 서울대 문리대라고는 웬만해서 말하지 않는다. 문리대라는 단어 자체에 취해 살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문(文)과 리(理)가 합쳐진 곳, 문리대는 바로 대학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의 한 단과대학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나의 동숭동 얘기는 그런 의미에서 그 시절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대학을 함께 다녔던 우리 시대 모두의 얘기다.
2.
1961년 봄, 나는 그 문리대 앞에 섰다. 만 61년 전 해 3월의 일이다.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대학천(大學川)을 건너 교문에 들어서는 순간, 거기 환하게 펼쳐있던 문리대의 교정을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투명(透明) 그 자체였다. 나는 섬뜩 불안을 느꼈다. 불안했던 건 새롭게 시작될 대학 생활에 대한 적응 우려 때문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전개된 문리대의 투명함 때문이었다. 너무나 시리도록 투명해 아무래도 누군가가 깨트리거나 어떤 괴력(怪力)에 의해 부서지고 사라질까봐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글 서두에서 밝힌 문리대의 소멸을 진작 예감한 걸까.
이 대목을 기술하면서 나는 불쑥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쓴 소설 『긴카쿠지(金閣寺)』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절이 불탄 화인(火因)은 평소 절의 수려한 미관(美觀)이 깨질까 불안해했던 한 반벙어리 중(주인공이다)의 자폐증 때문이다. 입학 첫날 내가 문리대 교정에서 느낀 불안 역시 그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입학식은 대학 교가를 미리 연습하는 걸로 시작됐다. 서울대 교가는 가람 이병기(李秉岐) 작사에 현제명(玄濟明) 작곡이었는데, 교가 가사 중 두 대목이 지금껏 기억에 남는다. 교가 첫줄, “가슴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 이 세상의 사는 진리 찾는 이 길을…”로 이어지는 대목이 그 첫 번째 기억이다.
이 세상의 사는 진리라!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진리일까. 이제 4년간 다니면 대학은 그 진리를 과연 내게 가르쳐 준단 말인가. 그보다 먼저,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대학 배지에 라틴어로 적혀있듯 “진리”는 과연 “나의 빛”(Veritas Lux Mea)인가.
또 하나는 교가의 마지막 구절 “… (더욱 더욱 융성하는) 서울데학교”다. 가사의 끝 구절은 분명히 ‘서울대학교’라 적혀있는데 노래 부르는 입학생들 모두가, 아니 단상에서 교가를 선창하는 음대 교수마저, ‘서울데학교’라 발음하니 이상했다. 전형적인 서울 사투리다.
교가를 부르는 건 4년간 단 두 차례, 입학식과 졸업식 때다. 그나마 졸업식은 그다지 참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어 교가를 함께 불러본 건 내 기억으로는 단 한 차례, 그날 같은 입학식 때뿐이었다.
그 처음이자 마지막의 교가마저 나는 철저히 ‘남남이 되어’ 불렀다. 내가 택한 외교학과(지금의 정치외교학부로 통합되기 전까지는 정치학과와 외교학과로 양분되어 있었다)에 어떤 인물이 입학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금한 일이었지만, 우리 과(科)에 여학생이 끼어있는지, 끼었다면 몇 명이나 되고 얼마나 예쁜지가 제일 관심사였는데, 나는 (또 우리는) 그 화려한 봄날 목청 뽑아 ‘서울데학교’만 불러 재친 것이다.
입학 당시 우리 주변엔 눈 붙일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TV도 없을 때고, 일간 신문이라야 4페이지에 불과했던 시절이다. 당시 유일한 낙으로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발간하던 월간지 《사상계》를 사서 교정 벤치에 누워 읽던 재미를 잊을 수가 없다. 그나마 돈이 모자라 두세 달 지난 걸 헌책방에서 반값으로 사서 읽는 데 불과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뻑적지근해진다. 내 목마름의 해갈(解渴) 용구로 사상계는 제 몫을 한 것이다. 지금도 기억한다. 매 호 《사상계》에 연재되던 장용학(張龍鶴)의 소설 〈원형(圓形)의 전설〉을 읽던 그 맛을. 문리대는 이처럼 나를 이 대학의 주물(鑄物)인 문사철(文學.歷史.哲學) 우위의 ‘먹물’로 서서히 구워내고 있었다.
3.
이 시절 내 뇌리를 지배하던 욕구가 하나 있었다. 변경(邊境)으로 달려가고 싶은 단순 욕구였다. 그 욕구에 빠져들면 나는 몹시 비틀댔다. 그 학년 그 학기의 시험을 완전히 잡쳤다. 그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또 빠지더라도 제발 학기말 시험 기간만은 피하기 위해 나는 들고 있던 펜촉으로, 책가방으로, 소주병으로 그 유혹을 찌르고 막아냈다.
그래도 힘이 붙여 끌려갈 수밖에 없을 땐 작부(酌婦)집 문고리에 매달려, 때로는 엉뚱하게 구름다리 너머 이웃 법과대학 형사소송법 강의실로 도망쳐 낯선 강의를 수강했다. 버티고 숨기 위해서다.
문리대 시절은 또 돈에 관한 한, 우리 모두에게 사고(思考)의 유년시절을 뜻한다. 가정교사 월급을 타면 친구의 학림다방 외상값도 갚아 주고, 하숙비가 떨어지면 다른 녀석 하숙에 들러 눈치밥도 숱하게 얻어먹었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날, 나는 논산 훈련소행 열차에 자원해서 올랐다. 어차피 내 DNA가 타율(他律)의 삶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 것이라면, 장교보다 졸병을 택하리라 해서, 이 방자하기 그지없는 천둥벌거지 김승웅을 실컷 자학하리라.
친구 누구한테도 나의 입대(入隊)를 알리지 않았다. 울먹이는 어머니가 서울역에 나오시겠다는 것도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3년을 버텼다. 3년 남짓 짝짝이 군화만 신고 다녔다. 훈련병 시절 나의 소대 기간사병이 내 새 군화를 슬쩍 바꿔치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향도였던 나는 그 기간사병의 체면을 지켜주느라 그의 헌 군화를 끌고 다녔고, 몇 번 수선을 하다 보니 그나마 짝짝이 군화가 돼 버렸다.
부대 주변의 작부들과 킬킬대며 놀아나던 것도 이 시절이었다. 그 시절 술 취해 목 터져라 울고 부르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생생하다. 특히 2절의 끝 구절 “외로운 동백꽃, 멍이 들었소”라던 대목이다. 정말이다. 콱 멍이 든 3년이었다.
1964년 봄, 그 문리대 앞에 다시 섰다. 만 30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다시 복학(復學)한 것이다. 아, 그리운 대학! 그때로 따져 5년 전 입학 첫날, 예의 문리대 교정에서 느꼈던 불안 끼 어린 투명(透明)은 이미 가셔 있었다. 학교가 바뀐 걸까? 아니다. 내가 바뀐 것이다. 나의 투명이 가신 것이다. 이 점, 내가 바랐던 바 아닌가. 바로 이걸 노리고 나는 군대에 뛰어든 거 아니던가.
내 경우 군대 친구가 없다. 기억나는 얼굴도, 이름도 거의 없다. 의도적으로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정작 뭘 기억하는가. 바로 문리대를 향한 회억(回憶)만을 기억한다. 등 뒤로 던져두고 훌쩍 입영 열차에 오르기 앞서 2년 반 동안의 그 아름답고 아름답다 못해 슬프고 때로는 음습하기까지 했던 서울 동숭동 시절을 군복을 걸친 채 두고두고 생각했다. 훈련 후 막사 창밖의 낙조(落照)를 지켜보다, 어쩌다 서울서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겁먹은 신병들의 배속신고를 받다, 때로는 군복 우의(雨衣)를 걸치고 비 내리는 들판을 혼자 헤매다 나는 번번이 예의 동숭동 시절을 생각하고 목이 메었다.
빗속의 들판에서 아우성쳐 부르던 흑인 스피리츄얼(靈歌)을 지금도 기억한다.
Green trees are bending
The poor sinners are trembling
The trumpet sound within my soul
I got to long to stay here!
군모(軍帽)에 스민 빗물이 내 얼굴을 적셨다. 그 빗물이 미적지근했던 걸로 미뤄 나는 분명 울고 있었을 것이다. 노랫말대로, 내 영혼 속의 트럼펫 소리여, 문리대여, 내 영혼을 강타했던 그곳 문리대의 투명(透明)이여! 언제 그곳에 다시 가려나!
4.
제대 다음 날 나는 바로 복학했다. 동숭동과는 그렇게 재회했다. 안성의 ‘신동(神童)’ 김진수(金瑨洙)도, 동기이면서도 으레 장형처럼 굴려던 경주의 수재 김무창(金武昌)도 계급장을 떼고 캠퍼스로 돌아왔다. 육군에서 카투사로 3년 남짓 영어만 쏼라대던 정치학과의 이부영(李富榮)도, 해병대 의장대로 발탁돼 수탉처럼 폼을 잡던 홍사덕(洪思德)도 군복을 벗고 다시 합류했다.
일찍이 내 영혼 속의 트럼펫 소리를 영가(靈歌)를 통해 건드린 제물포의 단아한 가수(歌手) 황정일(黃征一)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졸업 후 뒤늦게 논산행 열차에 올랐기 때문이다.
제대 후 그 문리대로 복학했고, ‘동숭동 시절’이 서서히 마감되면서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학교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졸업하기가 싫어졌다는 얘긴데, 이제 이대로 졸업만 하면 내 임무는 끝나는 건가. 이곳 대학에서 할 일은 이걸로 다 마쳤다는 건가.
이제 할 일이라고는 맘에 드는 직장 골라 취직하고 장가들어 애 낳고, 월부 차 구입하고,이어 집 마련하고, 승진하고, 알맞게 거드름 피며 골프채 번쩍이다 나이 들어 은퇴하고… 그리고 죽으면 된다 이 말이지! 이게 다란 말인가? 그게 싫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기가 싫었던 것이다.
허나 대학에 남아도 좋다는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수가 되어 남을 가르친다는 건 내 성미에 비춰 상상도 못할 일이고, 우선 당장 세끼 밥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누가 뒤에서 덜미를 잡는 걸까. 그 정체는 무엇인가. 혼란스러웠다.
이런 혼란은 지구로부터 정확히 38만 4천km 떨어진 죽은 달을 나는 매력 있는 생물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중천에 높이 솟아 입학 직후 연세대 뒷산의 내 어설픈 성인식을 지켜봤던 그 아름답던 달, 그래서 심하게는 서글프기까지 했던 골드문트의 달을 나는 군대까지 다녀 와 햇수로 7년째 맞는 대학생활 중에도 내내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동숭동 시절은 달 그 자체였다. 대학촌의 달빛이 특히 좋았다. 결코 4 더하기 3의 합산이 아니었다. 파스칼이 묘사한 ‘감성적’ 달과 ‘기하학적’ 달, 이렇게 두 개의 달가운데 나는 한사코 감성적 달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 점, 당시 내 스스로 생각해 봐도 한심스럽다 여겼고, 그래서 끼니 해결을 위한 일터를 서둘러 마련해야 했다. 졸업 반년을 앞두고 내가 소공동에 있는 (주)천우사(天友社) 직원이 된 건 그래서다. 전택보(全澤珤) 사장이 경영하던 천우사는 당시 국내에서 최고의 월급을 주던 일류 업체로, 이왕 밥값을 벌 바에야 최고가 최상일 듯싶어 응시했더니 덜컥 합격했다.
시험문제를 지금도 기억한다. 경제학 시험에 “한국 업체의 수출 신장책을 논하라”는 제목이 주어지기에 그 지난 학기 동숭동에 출강한 상대(商大) 임종철(林鍾哲) 교수한테 들은 대로, 스웨덴 학자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의 후진국 개발 논리와 라그나르 넉시(Ragnar Nurkse)의 ‘부익부 빈익빈’ 논리를 적당히 섞어 얼버무렸더니 합격한 것이다. 이 점, ‘동숭동 시절’에 지금도 두고두고 감사하게 여기며 산다.
5.
‘동숭동 시절’ 내 마지막 수업은 1967년 여름 혜화동에 사시는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박사의 서재에서 치른 ‘국제정치 연습’이었다. 졸업하는 우리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동주 선생은 조심스레 강의의 결론을 내렸다. 창밖 정원은 여름 한낮의 햇살로 가득했다. 햇볕 속에 송아지만한 셰퍼드 암수 한 쌍이 엎드려 있었다. 교수의 마지막 언급은 이러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제왕학(帝王學)을 공부한 거야… 자중자애들 하게. 그리고 큰 인물들 되라구! ”
나는 손을 들었다. 선생이 내 쪽으로 몸을 틀며 무슨 질문인지 궁금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나는 큰 인물 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예의 달 얘기를 꺼냈다. 달을 기하(幾何)의 달과 감성(感性)의 달 가운데 어느 달에 비중을 두고 봐야 옳을지를 물었다. 동주 선생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두 시각의 눈을 다 가지게. 그게 합리적인 거야.”
합리적이라… 어디선가 매미가 숨넘어가게 울고 있었다. 동숭동과는 그렇게 작별했다. 나한테는 〈마지막 수업〉이 된 셈인데, 지금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대목이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군대 3년까지 합쳐 도합 7년의 동숭동 생활을 마감하는 자리였던 만큼 “자네들은 제왕의 학문을 배운 거야!” “그게 합리적인 거야...”로 끝내기에는 (나한테 왠지) 합리적이지 못했다.
6.
나의 ‘동숭동 시절’ 기술을 예서 마친다. 이제 나는 목마름이 한풀 가셨다. 그곳 동숭동을 작별하고 나서 50여 년, 그 소멸의 절터를 먼발치로 훔쳐보며 언젠가 내 그곳 얘기를 기필코 써 보리라 별렀던 갈증이 이번 기회로 풀린 것이다.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든 송철원에게, 특히 그가 남긴 『아, 문리대!』에 감사한다.
2022년 7월
김승웅 쓰다
* 김승웅글방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