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칼럼> 라일락 꽃 향기의 추억 (박성훈 / 정치 6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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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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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꽃 향기의 추억

어디선가 소쩍새 울음이 들려오고 라일락 꽃향기가 고운 바람결에 실리어 오는 듯한 봄날입니다.

라일락 꽃 향기의 추억은 그 옛날,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 도서관과 4.19탑 사이에 하얀색 보라색으로 흐드러졌던 그 꽃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뜻도 모르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이었는지 그 향기에 한번 취하면 봄철 내내 몽환에 빠져 멀미하듯 비몽사몽 앓았습니다. 기후 변화 탓인지, 그 매혹적인 라일락 꽃 향기는 이젠 사라지는 것들 중에 하나지요.

그 옛 향기가 그리워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를 갔습니다. 지하철 을지로4가 역에서 내려, 종로 시계골목에 들러서 손목시계 배터리를 갈고, 추억의 길모퉁이를 돌아보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 시절엔 학교 울타리와 도로 사이에 ‘센江’(大學川)이 흐르고 ‘미라보 다리’를 건너 교문을 들어갔지요.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 학기가 시작되어 미라보 다리를 넘나드는 학생들의 발길이 부산해질 무렵, 울타리에 늘어진 개나리꽃들이 샛노랗게 개울 물가를 물들이면 교정에는 라일락 진달래 영산홍 온갖 꽃들과 느티나무 마로니에 은행나무 거목들이 어우러져 새봄이 왔음을 알리지요.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건물과 울긋불긋 화사한 봄꽃들과 싱그러운 신록의 이파리들이 맑은 햇살에 반짝이는 교정은 낭만과 경건의 성역이었습니다. 센江은 이제 흔적도 없이 복개되어 사라져 버리고, 대학로라는 이름을 하릴없이 달고 있습니다.


대학로 길을 건너려는데 우연히도 정말 우연히도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시는 은사님을 보았습니다. 우리 입학 동기들은 우애가 유난해 때때로 은사님을 모시기도 하고, 춘하추동 열리는 동문회 포럼에서 늘 뵙기 때문에 선생님과의 조우가 그리 낯설은 일은 아니지만, 길을 걷다가 이렇게 마주하기는 처음입니다. 깜짝 놀라 반가워하시는 선생님을 모시고 마로니에 공원 노천카페에 앉아 추억과 회포를 나누었습니다. 그 옛날, 입시생인 저에게 면접시험관이 바로 그분이셨지요. 반백년이 넘는 긴 세월, 인생을 한 바퀴 살아 본 노 사제는,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었습니다.

대학본부 건물 하나만 겨우 남은 교정은 자랑스러운 ‘서울대 옛터’라는 흔적조차 없이 황폐해버렸습니다
 
정치학자로서, 그리고 그 당시 ‘조국 근대화’ 과업의 중심에 섰던 정치인으로서, 심중에 담아두신 비장의 경험담들을 들으며, 선생님과 함께 추억의 교정을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총장실이 있던 대학본부 건물에는 무슨 의도인지 엉뚱하게도 ‘전시 사변 때 미팔군 사령부’가 들어와 있었다는 팻말만 붙어 있고, 국립 서울대학교의 중심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시는 없군요.

대학본부 건물 하나만 겨우 남은 교정은 자랑스러운 ‘서울대 옛터’라는 흔적조차 없이 황폐해버렸습니다. 오랜 세월 교정 한가운데에 늠름하게 서서 우리를 지켜주던 아름드리 거목들, 그 아래 벤치에 앉아, 고단한 일상과 불확실한 미래와 무모한 혁명을 고뇌하면서도 ‘진리의 빛’을 포기하지 않던 청년들, 자부심 충만했던 우리는 학처럼 고고한 선비이며 선구자인 삶을 꿈꾸었지요. 

기대와 촉망, 저렴한 등록금과 장학금의 혜택, 그 채무감과 사명감과 ‘진리의 빛’은 우리를 평생 올바름으로 인도하는 윤리 규범이었습니다. 
없어진 교문, ‘미라보 다리’가 있던 자리에 이르자 선생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망연히 홀로 서서 옛 추억에 잠겼습니다.

입학 후 4월 초, 첫 미팅이 도서관 옆 교내식당에서 있었지요. 밤이 깊어 모임이 끝나고 파트너와 함께 교문까지 걸어 나올 때, 문득 따스한 바람결에 라일락 꽃 향기가 4.19탑 수풀 쪽에서 실리어 왔습니다. 그날 미팅에서 받은 선물, 그 배꽃 로고가 찍힌 대학 노트를 저는 지금도 가지고 있지요. 

관악으로 캠퍼스를 옮겨 떠나 간지 어언 50년, 4.19탑도 함께 떠나, 지금은 작은 언덕 위에 고요히 서 있더군요. 그 옛날 동숭동에서 그랬듯이 해마다 새봄이 오면 소쩍새 울음소리와 라일락 꽃 향기가 아지랑이처럼 그 탑 주위를 감돌아 흐르고 있다고 상상해 봅니다. 

그립습니다. 그 시절 그 교정 그 에덴의 정원.

박성훈(정치69-73) 수필가, 전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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