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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완규 (생물 48-52) '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을 받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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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2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고


 
조완규(생물48-52) 전 모교 총장·국제백신연구소 상임고문

 
지난 10월 13일 나는 서울대학교 개교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그 전에 자연과학대학 유재준 학장으로부터 상 수상자로 추천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곤혹스러웠다. 시상증서에는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생물학의 여명기에 교수로 부임하여 연구와 후학양성에 전염, 자연과학대학 초대학장, 부총장, 총장직 재직 중, 대학안전과 발전에 기여, 그리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원장으로 한림원의 기틀 다지기, 그리고 국내 유일한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 유치와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직으로 연구소 일을 지원하고 있으며 교육부장관 역임 등 서울대학교 동문으로서 대학의 명예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간의 나의 행적을 높이 평가한 서울대학교가 나에게 주는 상이다. 
 
나는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부에 입학,  4년 간의 외국유학 기간을 제외하고는 오늘까지도 서울대학교 땅을 밟고 살아오고 있으니 나만큼 서울대학교의 혜택을 입고 살아온 동문은 없을 것이다.  2011년 10월 나는 첫 번째 ‘자랑스러운 자연대인상’을 받았다. 그때도 무척 민망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더 많은 은혜 갚음을 해야 할 상황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은 것이다.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예과부를 거쳐, 신설학과인 생물학과로 진학하였다. 새로운 생물학 분야인 세포학을 전공하였다. 특히 새로 도입된 생세포 염색법으로 염색한 생쥐 세포를 현미경 밑에서 관찰할 때 나타나는 염색체가 매우 신기하였다.  1952년 졸업한 후 바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였다. 당시 새로 나온 항생물질,Streptomycin이 생쥐 백혈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하여 생쥐 꼬리에서 적출한 혈액 중 백혈구를 슬라이드 유리에 실려 현미경으로 그의 운동능과 수명을 관찰하였고 그 결과를 정리하여 1956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1957년 전임강사로, 그 후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재임하였다.  교수직 재직 중에는 배양 중인 생쥐 난소의 배란 유도 혹은 배란된 난자의 성숙 억제와 관련된 연구에 종사하였다.  
 
1964년 2년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로 유학하여 배양 중인 생쥐 난소의 베란 유도와 관련한 연구에 열중하였다. 귀국 후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수령한 연구비 1만5천 달러로 생쥐 난자 배양에 필요한 실험용 기자재 등을 갖춘 실험실을 꾸몄고 실험에 열중하였다.  나의 지도로 석, 박사학위를 취득한 제자들이 나의 호를 딴 ‘설랑(雪浪)동문회’를 조직한 것이 거의 40년이 된다. 그동안 이들은 매년 연초, 5월의 ’스승의 날‘ 그리고 8월 여름에 모여서 각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동문 문하생들의 제자들이 모여서 1년간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등 학술교류 행사 등으로 이틀을 보낸다.  제자들이 꾸민 ’설랑동문회‘ 처럼 연례행사로 발전한 연구실 모임은 흔치 않다.  나의 사후에도 이 모임이 계속 지속되고 끝내 국제적 ’설랑 발생생물학회‘로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한참 연구실에서 연구에 전념하던 중, 1966년, 정치학과 교수인 민병태 학장으로부터 학생과장 임명 통고를 받았다. 당시 문학부 학생이 주도하는 반정부, 민주화 쟁취 등 구호를 외치며 벌어지는 시위로 연일 학내가 소란하던 때다.  따라서 문학부 교수가 학생과장직을 맡아 온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학부 교수인 나를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학생과장 임명을 고사하며 학장실에서 2시간 버텼지만 이미 발령이 난 뒤여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문, 사회학과대학 교수와 접촉할 기회도 없었고 또 그들을 알지도 못하며, 더더욱 당시 학장인 민병태 교수를 만난 일도 없었고 단지 실험실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나를 학생과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학부 교수요 실험실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나를 누가 학생과장으로 추천하였는지 아직도 모른다. 
 
앞의 학생과장은 누구라 할 것 없이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그 직에서 물러났다. 나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임기 2년을 채웠다.  대학본부는 나를 풀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외쳐대는 과격한 구호를 무디게 하도록,  2 시간 끌 시위를 1 시간에 끝내도록, 그리고 가능하면 강의실 혹은 도서관 시설을 점거한 철야 농성을 자제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들은 가끔 나의 그 같은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대신 나는 철저히 학생을 보호하였다.  형사가 수색 중인 학생을 숨기거나 혹은 집으로 데리고 가 하루 재워서 보내기도 하였다. 결국 살벌한 학내 분위기는 많이 풀렸다.  
 
그러니 대학이 나를 풀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물론 학생들도 나의 학생과장 연임을 바라고 있었다. 국문학과 전광용 교수는 ‘양쪽이 조 교수의 학생과장직 연임을 바라니 그는 성인인가, 군자인가, 놀랍다’고 평한 일이 있다. 원래 나는 선거, 피선거권이 있는 대학생은 당연히 정부에 대하여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의 학생운동 주동자들은 오늘날 각계 원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손학규, 유인태 등 원로 정치인이 있고, 김종섭, 이경형 등 현재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회장, 부회장이 있다.  
 
1974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1년 전, 신임 이해영 학장이 밤늦게 전화로 나를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직을 맡기기로 하였고 외국 출장 중인 10일 간 학장직무대리를 맡으라고 통고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연히 선배교수가 맡아야 할 자리를 까마득한 후배가 맡게 된 것이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이 학장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김포공항으로 떠났다. 물론 나의 이학부장 임명에 선배교수, 원로교수가 불만이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어쩔 수 없이 이학부장이 된 나는 본부의 양해를 얻어 1년 뒤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발족할 자연과학대학의 기초과학 교육 및 연구 수행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하여 미국 대사관 AID 담당관 Nable 박사를 만나 AID 차관금 획득관련 협의 끝에 차관금 500만 달러 획득에 성공하였다. 조건은 ‘10년 거치, 40년 상환, 이자 3%’였다. 일부 교수는 전액 연구용 기자재 구입에 투입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나는 차관기금 중 250만 달러를 80명의 자연과학대학 교수가 1년 혹은 1년 반 미국의 대학 또는 연구기관에서 체류하는 데 소요되는 재원으로 배당하였고 나머지 250만 달러로는 미국에서 쓰던 연구용 기자재 구입에 필요한 자금으로 배정하였다. 그리함으로써 교수들은 귀국 후에도 같은 주제의 연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자연과학대학의 연구역량은 일시에 국제수준으로 신장하였다.  정부가 지원한 차관사업 중 자연과학대학의 차관사업이 가장 성공한 예로 기록되고 있다.  
  
1975년 2월 말, 부산 출장 중인 나는 뜻밖에 내가 새로 발족한 자연과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원로교수 혹은 선배교수가 자신들이 맡아야 할 자리를 까마득한 후배가 맡게 되었으니 교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는 불문가지다.  본인의 뜻을 묻지도 않고 마구 학장발령을 낸 총장에게 나는 임명 철회를 강하게 요구하였다. 총장은 당시 나를 찾았다고 하였다.  
 
1975년 2월 28일 오후 6시, 정부가 최종적으로 문리과대학을 인문대,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의 3개 대학으로의 분리를 결정하였고 따라서 3월 1일부터 새로운 체제의 대학으로 출범하여야 함으로 밤새 학장을 임명하여야 하였다. 어찌되었던 학장으로 임명된 나는 대학 개혁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학과장인 원로교수가 신임교수를 추천하여 왔지만 나는 이 관례를 바꾸어 교수 공개모집 방법을 택하였다. 총장으로 부터 얻은 30개의 교수정원을 채우기 위하여 전문학술지, 신문 등 매체에 교수직 모집 광고를 냈다. 미국 등 명문대학교 학위 취득자 다수가 공모에 응하였고 그 중 인사위원회에서 천거한 후보자가 교수요원으로 임용되었다.  아울러 교수 연구비 관리제도를 개선하였다. 
 
그동안 교수 개개인이 관리하던 연구비 중앙관리제도에 불만인 교수도 있었지만 결국 나의 설득을 받아 드렸다. 연구비 총액 중 일정액의 연구비의 통장을 교수에게 교부하고 연구비 사용 영수증 제출에 따라 사용액수를 교수의 통장에 불입함으로서 연구비 사용에 따른 시비를 불식하였다. 이로써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의 교육 및 연구역량은 일시에 국제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같은 자연과학대학 개혁이 다른 단과대학으로 파급되었고 끝내 국내 여러 공, 사립대학의 개혁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80년 총장으로 부임한 고병익 교수가 나를 부총장으로 임명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부총장직은 본직이어서 교수직 사표를 내야 했다. 정년까지 아직도 10여 년이 남은 터에 2년짜리, 잘 하면 4년의 부총장직 수행 후 실직자가 될 부총장 임명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앞의 부총장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그들은 총장직을 승계하거나 혹은 지방 국립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행이었고 그리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장관에게 학장직처럼 부총장직도 보직으로 바꾸라고 건의하였다. 교육부장관은 나의 설득을 수용하고 서울대학교 부총장직을 보직으로 하는 교육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하였고, 국무회의는 이를 가결, 바로 이 (안)을 국회로 송부하였다. 그러나 그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태로 국회는 교육법 개정(안)을 계류한 채 해산하였다. 결국 다음 해 3월, 전두환 장군이 부상하며 대학생의 반대 시위가 극렬해 짐에 따라 학생지도와 관련, 책임을 지고 고병익 총장과 부총장인 나는 사표를 냈다. 결국 나는 실직자가 된 것이다. 

2개월 후, 새로 부임한 권이혁 총장의 배려로 나는 다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나는 두 번째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87년 8월 나는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사이 제명된 학생 수가 1300여 명이었다. 민주화 쟁취 시위를 하다 경찰에 잡힌 학생들의 이름이 대학에 통보되면 이들은 학칙에 규정된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총장이 서명함으로써 그 학생들은 자신도, 지도교수도 모르는 사이 제명된 것이다. 나는 학칙 중 학생의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학생징계권을 총장으로부터 단과대학 교수회의로 이관하는 학칙을 개정하기로 하고 이 개정안 승인을 교육부에 요청하였다. 교육부는 3개월이 지나도 서울대학교의 개정학칙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개정학칙을 승인할 경우 대학은 학생 시위로 더 혼란해지고 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퍼져 나라전체가 혼돈상태로 빠져들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뒤, 당시의 서명원 장관은 교수가 마련한 자율학칙을 존중한다며 개정학칙 승인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음 장관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재가하고 장관직을 물러난다며 개정학칙을 승인 날인 후 바로 장관직을 떠났다.  예상 밖으로 대학은 조용하였다. 단과대학 교수회의의 학생징계권 행사에 학생들은 굴복한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교무처장이 관리하는 교수 연구지원을 위한 학술연구진흥재단과 학생처장이 관리하는 학생장학재단이 있었다.  이들 기금을 은행에 예치하고 그곳에 나오는 이자로 교수 연구지원 및 장학사업을 시행하고 있었다.  나는 두 기금재단을 하나로 합친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재단’으로 개편하였고 이 재단의 관리를 위한 상임이사에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를 임명하였다.  조동성 교수의 기금확장을 위한 헌신적 노력으로 발전기금의 규모가 크게 확장하였다. 나도 인촌상 위원회가 수여한 ‘상금 5천만 원’을 발전기금재단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매월 일정액의 후원금을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에 기부하고 있다.

총장 재임 중 세계 여러 나라 대학 총장이 서울대학교를 찾았다. 그리고 학술교류를 제의하였지만 나는 즉시 이 제안에 응할 수 없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서울대학교 초빙교수의 숙박 시설이 빈약하였고, 둘째는 도서관 운영 체제가 단지 장서 역할을 할 뿐, 교수들 조차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폐쇄적이었고 셋째는 분야가 다른 교수들 사이의 교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같은 약점의 개선없이 세계 명문대학과의 교류는 오히려 서울대학교의 약점을 노출시틸 뿐이었다. 나는 이런 점의 문제 해결에 전념하였다. 우선 나는 삼성 이건희 회장 측과 협의를 하였다.  삼성 측은 1990년 3월, 이병철 초대회장의 아호인 ‘호암(湖巖’)을 딴 ‘호암교수회관’ 명의의 단기 및 장기간 숙박용 시설과 이들의 식사 및 회의를 위한 건물 3개 동을 건립하여 대학 측에 기증하였다. 호암교수회관의 숙박 등 시설은 거의 신라호텔 급이며 회관의 합리적 관리를 위하여 삼성측은 신라호텔 지배인을 파견하여 2년간 회관 관리를 위임하였다. 한 번 호암에서 숙박했던 외국인 교수는 호암교수회관을 선호하며 이제는 호암 교수회관이 서울대학교 명물로 자리 잡았다. 나의 임기가 끝날 무렵 청와대는 한화가 한 언론사 인수 대가로 헌납한 300억 원 가까운 재원을 총장인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이를 중앙도서관 운영체재 개선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서울대학교 도서관을 비롯한 전국 국립대학교 도서관 협의체를 구성하였고 도서관  자료의 교류, 열람체제의 일원화를 위한 제도를 개선하였다.       
  
1년 혹은 1년 반 후 사퇴하였던 이전의 총장과는 달리 나는 조용한 학내 분위기에서 4년의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성공적 대학 운영은 나 혼자서 이루어 낸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이 대학을 운영한 부총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기획처장 등 대학 보직교수의 헌신적 협력과 봉사가 있어 가능하였다. 1991년 총장직을 마친 나는 정년까지 1년 반이 남아 있어서 교수로 복귀할 생각이 없었다. 8월 중순 총장직을 끝낸 바로 다음 날 나는 중국 연길에서 열리는 ‘한민족국제학술회의’에 기조강연을 위하여 출국하였다.  
 
10일 간 체류 후 귀국한 나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당시의 학장이던 권숙일 교수의 배려로 여러 동료 교수들이 분담하여 나의 교수직 신규발령에 필요한 서류를 마련하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정년 1년 반을 남긴 내가 세 번째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다.  나처럼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세 차례나 발령받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나를 생각하는 동료 교수들의 따뜻한 마음씨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1991년 총장직 사퇴 후 3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보직교수들이 ‘4층회’ 이름으로 1년에 두어 번 모여 회식하며 두터운 우의를 다지고 있다.   
 
교수직으로 복직한 바로 뒤, 내가 교육부장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1992년 1월 정해창 청와대 비서실장의 전화를 받은 나는 장관 임명을 사절할 뜻을 밝혔다. 전화로 20여 분 ‘받으라’, ‘싫다‘의 언쟁 끝에 비서실장은 강한 어조로 ’오후 4시에 보도 나갈 것이니 그리 알라’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발령 받기 위하여 청와대로 갔다. 노태우 대통령은 ‘교육부장관 임명사절’ 이유를 물었다. ‘대통령 임기가 13개월 남은 때여서, 공무원이 앞으로 며칠 남았는가고 손가락 꽂고 있을 터인데 내가 교육부장관이 되더라도 아무런 도움을 드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대통령은 ’같이 고생합시다.‘ 라며 새 장관을 격려하였다. 장관 싫다는 사람을 임명하는 노 대통령의 포용력에 감탄하였다.  
 
1992년 3월 초, 교육부장관이 전국 대학교 총장에게 학생지도를 철저히 하라고 훈시를 내렸다는 기사가 일간지 일면을 덮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알아 본 즉 대학국장이 학기 초에 장관명의의 훈시를 보내는 것이 관례라고 하였다.  장관과의 협의없이 장관 명의로 된 훈시를 보낸 것이다. 나는 매우 곤혹스러웠고 또한 불쾌하였다. 장관 취임사에서 대학의 자율적 운영을 권유했던 내 이름으로 총장에게 엉뚱한 훈시를 보낸 것이다.  당시의 대학국장은 대학에서 근무해 본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공무원이 대학을 통제하는 업무를 다루고 있어서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1년 간 지방 대학교 사무국장으로 근무한 후 다시 교육부 본부로 복귀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대학국장을 지방의 한 국립대학교 사무국장직으로 내려보냈다.  
 
그는 이를 좌천으로 판단, 그 충격으로 암이 발생, 끝내 1년간 고생하다가 타계하였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일은 교육부 공무원의 기강을 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던 중 인천시민이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백인엽 장군에 대한 처리를 요구한 것이다. 그동안 백인엽 장군이 인천시내에 걸립한 인천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이 14개가 된다. 통상적이면 육영사업에 헌신한 공으로 인천시내 곳곳에 송덕비가 서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백 장군은 원망의 대상이었다. 교육기관 건립 구실로 인천 시내 곳곳 부지를 징발하거나 부지를 싼 값으로 몰수하였다고 한다. 인천대학교 선인재단 이사장이 전 교육부차관이어서 인천대학교 문제점이 있더라도 교육부가 눈감아준다며 인천시민의 불평이 컸다. 나는 곧 교육부 감사를 파견하여 인천대학교 재단의 감사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10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나는 이사장에게 이 문제를 1개월 안에 해결하라고 지시하였고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사진 전원을 해임할 것이라고 통고하였다. 물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나는 바로 이사진 모두 해임조치를 하였다. 재단기금 150억원 가운데 반인 75억원을 백인엽 설립자에게 지불하고 이 대학의 관리를 인천시에 넘겼다. 이런 조치를 그대로 받아들인 백인엽 장군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가 이같은 처리에 불만하여 소송을 제기하여 대법원까지 끝고 갈 수도 있었고 대학 문제해결은 더욱 힘들고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결국 백인엽 장군의 굴복으로 인천대학교는 인천시립대학이 된 것이다. 나는 사전에 청와대 의견을 듣지 않고 인천대학교 문제를 처리한 책임을 지고 바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장관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으로 청와대 대통령실을 찾았다. 그런데 의외로 노 대통령은 인천대학고 처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나에 대한 노고를 치하하였다. 인천대학교는 그 뒤 캠퍼스를 송도로 옮겼고,  조동성 교수 그리고 박호군 장관 등이 총장으로 부임하여 인천대학교 개혁에 노력하였다. 끝내 인천대학교는 국립대학교로 승격하였다. 송도에 조성된 인천대학교의 새로운 캠퍼스는 인천을 대표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다. 
 
교육부장관의 임기가 끝날 무렴 장관 등 교육부 공무원이 국회 교육체육청소년위원회 위원회에 불려나가 하루 종일 국회의원에게 시달렸다. 조순형 위원장은 나의 대학 교수 때 특히 총장 때의 일 그리고 장관 때 각 대학의 자율화 정책과 관련한 나의 노력과 관련하여 분에 넘치는 칭송의 말을 끝으로 분과위원회를 마무리 하였다. 일부 동석했던 교육부 관료는 조 위원장의 나에 대한 칭송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의례히 정부 관료들은 국회의원의 거친 질타의 발언에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 통례이지만 이번 일은 참으로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한 달 뒤 조순형 위원은 나를 찾아 그 때의 자신의 발언 내용을 붓으로 적은 액자를 ’가보‘로 두라며 건네주었다.  1993년 2월 말 장관직 끝날 때가 교수직 정년과 일치하여 결국 모든 공직에서 벗어났다.  
 
1994년 9월, 이상수 과학기술원 원장이 위원장인 ‘과학기술아카데미’ 발기모임을 가졌다. 설명에 따르면 이 아카데미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소속인 기관이다. 이상수 위원장의 설명을 듣고 이 아카데미가 과학기술자의 재훈련, 재교육 과정의 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계 중진, 원로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고려시대 학자를 한림학사 등으로 불렀으니, ’과학기술아카데미‘를 ’과학기술한림원‘으로 고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모두 그 자리에서 박수로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뒤로는 과학기술한림원(한림원)이 되었다. 그리고 한림원 행사에는 ‘한림 (Hallym)을 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령 한림심포지엄(Hallym Symposium), 한림원탁토론회(Hallym Round Table Discussion) 등이다. 그리함으로써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세계화를 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행히도 그 이후 한림원 주최의 모임에는 ’한림‘을 붙인다.  
 
그 해 11월 과학기술한림원의 창립총회가 있었다. 그 동안 이상수 과학기술원 원장, 초대과기처 장관인 김기형 박사를 위시한 과학기술계 중진이 한림원 발족 준비위원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동안 준비에 수고한 이상수 원장이 초대원장으로 선임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원장추천위원이 된 이들 준비위원이 나를 초대원장으로 추천하였다. 나는 매우 난감하였다. 한림원 준비에 관여하지 않아 구체적인 한림원 창립 목적과 사업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는 나를 원장으로 추천한 것이다. 거절할 틈도 없이 회원 모두 큰 박수로 나의 원장 추천에 찬동하였다. 창립원장이 된 나는 바로 한림원을 과총에서 분리한 독자적인 법인단체로 개편하고 감독청의 승인을 받아 이를 ’한국과학기술한림원(Korean Academy of Science)‘ 이름으로 새로 출범하였다. 전무식 박사, 권숙일 서울대 교수 등을 부원장으로 선임하였다.  
 
과총은 이미 500명을 회원으로 선임하고 있었다. 이들 회원 가운데는 학문적 기여보다 학회 회장, 부장 혹은 장관, 차관 등 행정적 기여를 한 인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회원 자격을 심사하기로 하였다. 전무식 부원장을 회원추천위원장으로 지명하였고 나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나는 회원이 될 사람이 빠진 것은 참을 수 있으나 회원 자격이 없는 사람이 회원이 된 것은 참을 수 없으니 4분의 3 득표를 한 후보자를 회원으로 추천하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이미 추천회원 500명 중 단지 40명만이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나는 국내외에서 누락된 적격자를 추가하기 위하여 임시로 100명을 증원하여 결국 140명의 회원으로 한림원이 발족하였다. 이 같은 조치는 한림원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과학재단과 협의차 서울에 체재 중인 영국 Royal Society 부원장인 Brian Heap경이 한림원 발족과정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나의 오랜 친구인 Heap경은 바로 한림원과 영국 Royal Society와의 학술교류를 제의하며, 영국 런던 Royal Society 내 그의 사무실로 나를 초청하였다. 협력 조인을 끝내자 바로 프랑스 아카데미 원장인 Grumberg Manago 박사 초청으로 프랑스 파리의 그녀의 사무실에서 학술 협력 협약을 맺었다. 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 학술원 원장인 Gus Nossal 경과도 학술협력 협약을 맺었다. 이처럼 한림원은 발족하자마자 세계 한림원의 한 가족이 된 것이다.  
 
1995년, 한림원 창립 1주년 기념행사에 200여 명의 세계 아카데미 원장 등 원로과학기술자를 초청하였다. 초청자 가운데는 영국 Royal Society의 회장을 역임한 George Porter 경과 회장인 Klug 교수, 프랑스 아카데미의 Grunberg Manago 원장, 미국 NAS 부원장인 Ebert 박사, 러시아 아카데미의 Alferov 박사, 일본 학술원 Ito 박사 그리고 중국 과학원의 주 광조 원장 등이 포함된다. 그 뒤로 한람원은 확고한 기틀 위에 각종 학술 행사를 주관하며 세계 학계에 부상하고 있다. 
 
1990년 세계 나라 정상 70여 명이 UN에 모여, 개발도상국 어린이가 400만명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며 이의 해결책을 논의하였다. 이 때 앨버트 아인슈타인 대학 화학과 교수인 신승일 박사가 국제백신연구소(IVI) 안을 제시하였고 UNDP가 이를 받아들여 여러 나라에 연구소 설립을 권유하였다. 5000평 부지에, 5000평 크기의 연구소 건물, 60만 달러의 연구용 기자재 제공 그리고 매해 운영비 200억원 중 30%인 70억 원 지원이 유치 조건이었다.  
 
연구소가 할 일은 개발도상국 어린이를 위한 값 싼 전염병 예방용 백신개발이다. 1991년 총장 임기가 끝날 무렵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 설립 계획을 알고 나는 우리나라에 연구소가 유치되기를 바랐다. 백신은 생명과학연구의 산물이며 세계 생명과학자를 유치하여 이들과 공동연구할 경우 우리나라 생명과학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연구소 유치위원회는 나를 유치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당시 총장인 김종운 교수가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에 5000평 규모의 연구소 부지를 제공하였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국제백신연구소 한국 유치 이유를 설명하였고 대통령은 즉시 이에 찬동하였다. 1995년 UN 설립 50주년 기념 총회에 참석한 김 대통령은 ‘한국이 세계 어린이 질병 퇴치를 위하여 국제백신연구소를 설립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2003년 연구공원 내에 5천 평 규모의 연구소 건물이 건립되었고 국내외 70여 명의 연구요원이 어린이 전염병 예방용 백신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외교 사절단, 관계, 학계 그리고 산업계 인사 2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대한민국이 국제기구인 5천 평 규모의 ‘국제백신연구소(IVI)’ 건물을 건립, 기증, 그리고 앞으로 계속하여 재정지원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정부가 연구소 운영비 약 200억원의 30%인 70억원을 부담하지만 나머지 70%인 130억원은 후원금으로 메꾸어야 한다. 결국 후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한국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후원회는 김재순 전국회의장을 회장으로, 그리고 나를 이사장으로 선임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유일한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한국후원회 명예회장에 김대중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를 추대하였다. 그 이후로 연구소의 명예회장은 역대 영부인이며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의 영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예회장 추대행사를 가졌다. 지난 20년 동안 빌 게이츠 재단이 1억5000만 달러를 후원하는 등 매년 8~9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한국 정부 및 후원회도 활발히 연구사업을 돕고 있다.  3년 전, 국제백신연구소는 2-3만원 하는 콜레라 백신개발을 단돈 2000원짜리의 값싼 경구용 백신 개발에 성공하였다. 우리나라 벤처인 ‘유바이오로직스’가 춘천에 대규모 공장을 설립하여 값 싼 콜레레 백신, ‘유비콜’ 생산에 전념하며 몇 달 전 1억 명분 콜레라 백신 생산 축하행사를 가졌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콜레라 백신의 공급에 소요되는 비용은 내가 회원인 한국 국제로타리 클럽 3640지구 총재와 협의하여 이미 20만 달러를 부담하여 네팔 등 개발도상국 어린이에게 접종함으로써 그들의 귀한 생명을 구하였다.
 
 지난 해 연구소 창립 25주년 기념식에서 나와 박상대 교수, 신승일 박사 그리고 초대 연구소 이사장인 Harvard 대학교 보건대학원장 Barry Bloom 박사가 연구소 창립의 공으로 ‘Founder’s Medal’ 을 받았다. 나는 연구소 유치위원장으로, 박상대 교수는 유치위원회 간사로, 그리고 미국 앨버트 아인슈타인 대학교 신승일 교수는 IVI (안)을 창시하였고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학교 교수를 사임하고 UNDP 전문위원이 되어 IVI 발족에 크게 기여한 것이 수상 이유였다. 특히 박상대 교수는 유창한 영문으로 한국 내 연구소 유치 타당성을 기술하여 이를 UNDP에 제출하였고 UNDP가 최종적으로 한국을 연구소 유치국으로 결정토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연구소 설립에 참여한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일 연구소 내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실로 출근하며 연구소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번에 나에게 준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은 나의 그 동안 걸어 온 족적을 평가하고 주는 상이며 나에게는 큰 영광이고 그저 고마울 뿐이다. 나는 그동안 서울대학교가 나에게 베푼 은혜에 감사하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더욱 성실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삶을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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