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자댓글
0조회
754등록일
2024-06-05
양승영 (지질 57-63) 총동신문 기고, '볼케이노'의 추억
경북대 명예교수
나의 동숭동 대학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지식에 대한 갈증을 심하게 느꼈다는 사실이다. 교수들이 제시하는 레퍼런스(참고 문헌)도 서울대 도서관에 없었다. 당시 국내에서 최다 장서를 자랑하던 서울대 도서관이지만 도서목록에서 지질학 관련 도서가 없었다.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 지질학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 나는 대로 동대문 청계천 고서점을 훑어 미군부대에서 폐지로 흘러나온 ‘Introduction to Physical Geology’와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적 정도를 어렵게 구입해 읽었다. 우리말로 된 학술서적이 전혀 없었다.
2학년이 되어서 정창희 교수가 출간한 ‘지질학개론’(박영사)이 유일했다. 초창기 지질학을 공부한 사람치고 정교수의 ‘지질학개론’을 읽지 않은 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몇 년 전에 작고하신 정교수는 글자 그대로 한국 지질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최근까지 정교수의 ‘지질학개론’은 지질학의 바이블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우리 동기들이 생각해 낸 것이 최신 전문지식을 얻기 위해서 학생 학술지 ‘볼케이노(Volcano)’를 출간하자는 것이었다. 학생들 가운데는 가정형편이 나아 원서를 구독하는 이도 있어 그 내용을 나눠 갖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교수들의 강의 내용을 미리 숙독하고 있음을 자랑했다. 당시 원서 한권을 구입하려면 공무원 한 달 봉급을 몽땅 털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가난한 대학생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지질학회지 창간호가 발간된 것은 1964년이고 우리 57학번 동기가 졸업한 3년 후였다. ‘볼케이노’가 우리 동기가 졸업한 후 흐지부지 된 것은 졸업 후 지질학회지가 곧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갈증과 열정을 알 수 있는 일이다.
1973년 일본에 가서 놀랐다. 거기엔 자국어로 저술된 최신 전문서적이 바다처럼 넘쳐나지 않겠는가. 대학 교재라고 할 수 있는 서적들을 누구나 손쉽게 구독할 수 있어 매우 부러웠다. 전문서적일수록 이해가 어려운 학술용어가 많아 학부 초년생이 원서를 읽기에는 벽을 느끼기 쉽다. 특히 지질학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통계학 그리고 지리학에 관련된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1970년대 후반 들어서 전문서적의 복사판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어 시중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서를 학부생들에게 그대로 권하기는 어려워 번역 출간이 긴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한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보다, 원서 번역이 실질적인 학계에 기여한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고생물학 원리’, ‘고생태학’, ‘진화 고생물학’, ‘야외지질학’, ‘지사학’ 등을 번역 출간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 지질학자들이 반세기 이상 조사한 지료들을 모아 펴낸 조선총독부 산하 지질조사소 소장인 타테이와 이와오(立岩巖)의 저서를 ‘한반도 지질학의 초기 연구사’로 개칭해 출간했다. 이는 한국 지질을 연구하기에 앞서 선행 연구를 파악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어서, 우리 지질학과 학생들에겐 필독서이다.
전문서적 번역과 함께 전문용어를 쉽게 풀어 설명하는 지질학사전 역시 매우 절실함을 느꼈다. 이를 위해 1970년대 이전부터 학회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되어 출간 계획을 세우고 두 세 차례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10여 년의 시간만 흘러가고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학회에만 맡겨서는 부지하세월이라 생각해, 나 자신이 이 일을 맡기로 작정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이 작업에 돌입했다. 다른 연구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않고 이 일에 몰두했다. 1만1000여 개 학술용어를 수집하고 이 용어들을 간결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작업에 10여 년을 소비했다. 이러한 작업에는 때마침 등장한 PC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설명에서 오류를 잡아내기 위해 학계의 세부 분야 전문가들 30여 명을 동원해 사독을 부탁하고, 마지막으로 학계의 원로인 정창희, 이상만 교수 그리고 이하영 선배교수에게 사독을 부탁하고, 마지막 손질은 57동기생인 진정주 학형에게 부탁해서 1998년 교학연구사를 통해 햇빛을 보게 됐다. 이러한 일에 매달리다 보니 어느덧 나 자신이 퇴임하기에 이르렀다. 초판이 출간된 지 26년이 지난 현재, 그동안 새로 등장하는 용어들을 보충해서 증보판 출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양 동문은 30여 년간 경북대 지구과학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화석회’를 결성했다. ‘지질학사전’ 편찬을 비롯해 ‘한국화석도감’, ‘한국공룡화석’, ‘한국의 거화석’ 등 전문서적을 집필했고, 자전 에세이 ‘어느 지질학자의 삶과 앎’을 펴냈다. 한가로움 속에 읽고 쓰는 삶을 즐긴다.